'2011/09'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9/29 내 마음이 아니라 몸이 황무지 (2)
  2. 2011/09/23 허상의 표상 (8)
  3. 2011/09/20 복권 (4)
  4. 2011/09/14 억울의 실종 (2)
근무시간이 좀 많은 거 같았지만 그래도 알바는 어쩔 수 없다 싶어서 백만원 조금 넘는 월급에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형이 매장 앞에 와서 반가워 나갔는데 들은 말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였다. 아니, 이 형이 아니었나? 여하튼 살이 쪘다는 말보다는 빠졌다는 말을 더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친구들은 알겠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안되는 체격이다; 
일도 하고 있었다는 건 맘만 먹으면 엥겔지수를 90%까지 올릴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나의 거의 모든 알바 경력은 음식점에서 나오므로(이런 곳은 대부분 식사-_-제공이다.) 기초적인 생활정도는 힘들지 않게 영위할 수 있는데도, 살빠졌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근 1년간 잘 먹고 잘 지내다가 생활이 바뀐지 보름 남짓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말하던 '살빠졌다'는 말을 이제는 내가 스스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론 앙상해진 거였다. 이거 좀 신기했는데, 나는 원래 눈썰미랄까, 타인의 대한 관심이랄까 그런 것이 되게 부족한지 티비에 연예인이 나와서 누군가 '쟤 살 많이 뺐네.'해도 전혀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런 능력을(?) 습득한지도 몇년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변화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어른됐네, 어른.

당연히 소설이겠지만, 인터넷에서 텐프로 출신 여성의 일기같은 걸 얼마전에 읽어봤는데, '다른 언니들은 돈 달라고 들이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않아서 오빠들이 좋아했다.' 뭐 그런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돈이 급하지 않아서 일하는 것이 아닌 게 장점이 되는 셈이다. (아, 저 위에 말한 매장에서 그만둘 때, 대판 싸우고 나왔는데 그때 점장이 마지막으로 나보고 '너는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는 그냥 그 공간, 가로수길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뿐이라 가만히 있었는데, 나중에 이 이야길 들은, 같이 일하던 친구는 꽤 화를 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었던 게 아니 돈이 급하지 않으면 내가 대학 휴학하고 왜 하루에 10시간씩 일했겠냐고... 라고 한쪽으로 몰아갈 수 있겠다.)
뭐 어쨌든 금전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구석에 몰리지 않은 사람의 긍정적 태도는 상당한 것 같다. 07년쯤에는 별거 아닌 애들이 자신감은 쓸데없이 많아서 보기 싫은 구석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 자체가 창피해서 자진납세하듯 먼저 말하고 싶을 정도다 ㅋㅋㅋ 

월초에는 생돈을 잃어버려서 사서 고생했었는데, 최근에는 뭐 산 게 없는 거 같은데 잔고가 바닥나버렸다. 눈에 띄는 소비래봤자 좀 비싼 vga케이블과 좀 싼 토너를 산 게 전부인데 난 뭐한 걸까. 무려 8월 교통비도 납부하지 않았는데! 라고 투덜거린 게 일요일쯤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연명해가고 있다. 기숙사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는 날엔 편의점에서 할인카드와 함께 라면과 삼각김밥을 사고 재빨리 먹은 후에 강의실 직행...한 게 이틀이었는데, 딱 그 이틀이 지나니까 살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시효과일까 부정적인 위약 효과일까. 

반 찌질이 반 병신같은 마인드로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된 다음 날, 솔직히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인가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는데 그 날 아침에 삼양동 집의 인터넷 요금과 내 핸드폰 요금이 결제됐다는 문자가 날라왔다. 잔고가 만얼마 수준으로 떨어지니까 기분도 다운됐는데,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을지언정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조금 편해졌는데 문제는 이제 몸이 황무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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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KT 2011/09/29 23:0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 결국 헤어졌냐? 킁;;;; 아쉽구만...

허상의 표상

문화생활 2011/09/23 21:53 |

미스터 브레인워시 @ 오페라 갤러리


얼마전에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를 보았다. 뱅크시에 대한 관심이야 다른 사람처럼 나도 여전하지만, 갤러리로 들어가버린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큐도 그만큼의 거리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볼 수 밖에 없었다. 단순한 과정에 말이 많아지는 걸 보니 감정과잉의 안좋은 형태다. 
킨코스에서 가위질을 하는 셰퍼드 페어리(묘하게도 창헌이 형이 생각난다.)와 그와 연락을 하고 지낸다는 뱅크시의 모습이 재밌었다. 새삼스럽게 그들의 사생활이 궁금했었나 싶고.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처음 볼 때, 작품과는 관계없이 임팩트를 받게끔 하고 싶은 뱅크시의 의도도 어느 정도 패턴화된 것 같았다. 아동용 페이스페인팅 물감을 칠한 코끼리나 다큐멘터리의 제목에서처럼. 
영상의 마지막에서 뱅크시는 '누구를 만나든 예술을 해보라고 권한다. 사실 그것이 맞는 것이고... 하지만, 브레인워시 이후로는 절대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술이란 것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모던 아트나 팝 아트 따위로 불리워지는 시장에서 미술품을 감상하고 거래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묻고 있는 듯 하지만, 출근시간처럼, 이미 뉘앙스는 정해져있다.

그리고 어제, 용건이 있어 서울에 올라왔다가 그냥 가는 것이 아쉬워 트위터에서 봐두었던 전시회를 돌아다녔다. 뱅크시의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뭔가 될 것 같은 어떤 한국계 작가와, 미술품 콜렉터인 어느 회장님의 소장품 전시회를 보러 가던 길에 청담동쯤일 것 같은 사거리 어딘가에서 낯익은 형태의 그림을 발견했다. 

애초부터 제대로된 감상이 불가능한 게, 나는 본디 팝 아트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들어왔던데다가 다큐를 본지 얼마 안되서 멀쩡한 평가를 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그러니까,
강남에서,
유리창 높게 세워 갤러리를 열고,
정장을 차려입은 직원이 있는 가운데,
전시를 하는데 그 주제가 공교롭게도 그래피티 기반의 팝 아트였고,
미스터 브레인워시가 그 전시의 주인공이었다. 


하도 궁금해서 전시중인 작품은 갤러리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말끔한 직원들에게 속내를 들킬까 두려워 목구멍 속에 넣어두었다. 

후천적 선입견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리는 이 아노미를 어째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더 혼란스러웠다. 사실, 더 돌아다니다가 연간매출 업계 1위에 빛나는 서미 갤러리도 이쪽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프랑소와 피노 콜렉션이 있던 송은 아트스페이스 1층에서 차를 마시던 중년 어르신들은 "소머리국밥 보고 왔냐"는 농을 나누고 계셨다. 오후 4시, 5시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분들의 대화치고는 키치했다. 

예술이니 아트니 하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 뭔가 굉장히 큰 통념을 장벽처럼 세워두고 그 뒤로 숨거나 그 위에 올라가 내려보려는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아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그렇게 유사한 편린들이 한데 모여있는 것 같아서 내심 안타깝기도 하고 재밌었다. 어차피 다 허상인 것 같기도 하고, 그 허상을 향유한다는 표징을 남기는 것이 괜시리 부질없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프랑소와 피노 콜렉션은 시간과 공간적 여유가 난다면 한번쯤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무료 전시인데다 도슨트 역할하시는 분들도 친절했고, 무엇보다 무라카미 다카시나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 말입니다. 무라카미의 말도 안되는 조형물의 퀄리티가 정말이지 엄청나서, 젖과 자지와 크림을 보며 '우와'를 연발하는 망측한 풍경을 연출하였습니다. 물론 무라카미가 있던 1층의 도슨트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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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limeseoul.com BlogIcon 슬라임 2011/09/23 22:2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 좋은글 입니다! 정말 글 잘 쓰세요!

  2. BlogIcon 장윤수 2011/09/27 19: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우왕 프랑소와 피노 컬렉션이 있었군요. 저도 다카시가 만든 젖과 잦이와 휘몰아치는 증액을 보며 '우와'를 연발해야 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9/29 15:27 Address Modify/Delete

      저는 사실 프랑소와 피노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역시 직접 가서 보면 놀랍습니다. 공부 안해갔는데도 도슨트분들이 다 알려주시고... 너무 편해요.

  3. jenny 2011/09/28 11:01 Address Modify/Delete Reply

    글 참 좋네
    팝아트 어려워...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9/29 15:27 Address Modify/Delete

      난 팝아트 좀 싫음...
      사실 아트 자체를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고 ㅎㅎㅎ

    • jenny 2011/09/30 14:26 Address Modify/Delete

      나는 아트한다고 깝치는게 싫어........
      (나 요새 비뚤어져서 왠만한건 다 싫긴해)
      서현 함 오소- 한강도 좋코-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10/03 20:02 Address Modify/Delete

      그렇습니다. 저도 선천적인 청개구리라서 남들 좋아하는 거 쉽게 못 좋아합니다 킁;

복권

내 이야기 2011/09/20 00:17 |
재수할 즈음에 400억짜리 로또광풍이 불었다. 가뜩이나 작은 창문에 쇠창살까지 달았던 곳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바깥은 어렸했으랴. 재수는 하고 있지만 미성년자라서 사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는 대내적인 이유로 일확천금에 대한 관심을 일축했으나 사실 나는 그런 운이 없다. 공짜에 관해서는 '될 턱이 있나'하는 선천적 회의주의자도 아닌데도 역시나 나와 운의 거리는 멀다. 어린 마음에 '뽑히면 좋겠다는 마음만 안 가지고 있으면 뽑힐거야'라는 순진멍청한 태도도 견지해보았지만 역시나 닭 쫓던 개꼴.

어느 정도의 기준점이 지나고 나서는, 토요일 저녁에 서둘러 로또를 사고, 티비를 보면서 번호를 맞춰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평범해보여서 싫어했다. 혐오했던가. 내가 뭐라도 된듯, 아니 나는 뭐라도 되지 아니한 듯 싫은 티를 내며 고결한 척 고까운 티를 냈다. 

얼마 전에는 a와 같이 로또와, 연금복권을 샀다. 하나는 익숙한데 하나는 매달 오백을 주는지 매년 오백을 주는지 헷갈려서 a와 나는 안내문을 해독하는데 꽤 공을 들여야했다. 그리고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뽑힌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면서 동네를 걸어다녔다. 우리는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 다녀왔고, 집을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참이었다.

그날 저녁 이같은 이야기를 들은 b는 언젠가의 나와 같은, 그 찡그린 표정을 보여줬다. 네 마음은 알고 나도 좋은 행동은 아닌 것을 알지만 어찌됐든 상관없지 않느냐. 되면 좋은 일이고 안되면 다음을 기약하고. b는 표정을 풀지 않았고, 이제는 a가 갸우뚱거렸다. 

복권따위에 매달리는 삶, 복권 가지고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삶.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인가. 사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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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훵키훵키 2011/09/22 14: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그렇게 한 번 꿈꾸고 그걸로 한바탕 웃기도 하고 그런답니다.. 웃을 일이 조금씩 줄어드네요. 같이 힘내용!!

  2. 슈3花 2011/09/23 13:5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무리 좋은 꿈을 꾸고.. 조상님이 점지해준 번호대로 번호를 찍은 후에 복권을 산다고 해도.. 현실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더군요ㅠ 그래도 우리 힘내요!!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9/29 15:26 Address Modify/Delete

      아 하나 더 사야하는데 말이죠...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꼭ㅋ

억울의 실종

내 이야기 2011/09/14 20:40 |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연휴 다음날 발표를 잡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여하튼 끝내고 나니 노곤해진다. 몸이 힘들다기보다는 무언가 늘 쫓기고 있다는 마음의 피로였지 않았나 둘러댄다. 누군가는 그런 데서 오는 스릴을 찾는다던데 내게 실제로 오는 것은 스릴보다는 중압감에 가까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못하고, 힘들어하고, 피하는 것은 어떤 정신병일까. 부족함을 질환으로 돌리는 것은 우리집 어른들이 자주 하시던 말인데, 시나브로 나도 물들어버렸다. 어른이 되버렸나. 어느새 다 컸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투덜거린다. 무능은 죄악이니까.

구십몇년인가 만난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았던, 어떤 계모는 내게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내가 무언가(아마도 장난감이었을까, 사실 그게 무엇인지는 이제와서 중요하진 않다.)를 사달라며 응석부리는 것을 막으며 이야기해주었다. 괜한 사람에게 응석을 부렸다는, 또 다른 실수가 생각나지만 뭐 그런 것 말고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들은 말은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뇌리에 박혀 있다. 어찌보면 되게 불행한 건데 그것마저 당연한 척해야 하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 배웠나? 모르겠다. 듣긴 들었다만 그당시도 지금도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다보니 중요하지 않은 말이 오랜 기간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주일 용돈은 이천원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천원이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는 한달에 얼마씩 받아서 쓰는 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였기에, 계모와의 용돈 협상 자리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때도 군것질을 좋아했던 터라 하교길에 삼백원하는 유리병 환타를 사먹을 수 있겠다 싶었고, 그걸로도 족하다 싶어서 시세 모르는 용돈 지급에 응했다. 사실 그전에도 할머니께 슈퍼를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천원을 받긴 했다. 뭔가 좀 뒤틀려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때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보통의 핵가족 형태를 처음 가진 때였기 때문이었나. 새로 산 침대와 일학년부터 쓰던 동서가구 책상이 같이 있는 내 방이 있는 때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살고는 있지만 뭐 딱히 행복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가깝게 지내야겠다 싶어, 이모라고 부르던 계모를 엄마라 부르며 볼에 뽀뽀를 하는 그야말로 어린이 프로에나 나올 법한 흉내도 해보았지만, 처음 부르는 호칭은 어색했고 입술에 푸석함이 닿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뭐가 행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뭔가 없었고 부족했으며 아쉬웠다. 

 
스무한 살인가 누가 무얼 가지고 사냐며, 삶을 사는 원동력이 뭐냐며 물어봤었다. 스스럼없이 분노.라고 답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들어도 배를 부여잡고, 침을 튀기며 크게 웃으면서 그때 나 정말 병신이었네. 하고 까도 내가 먼저 까고 말겠지만, 실은 뭐 좀 그랬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고. 무울론 당신께서야 손주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지마는 뭐 계속 그런 분위기였다. 아버진 고졸이지만, 할아버지가 안계신 상황에서 작은 아버지를 육사에 보냈다. 세 분의 미묘한 감정선을 그나마 추측할 수 있게 된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가 전역한 후였다. 

뭐 좀 그랬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뭔가 엄청난 자극을 받고 공부에 매진해서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 미스터 최가 되는 것이 5부작 인간극장 中 4편쯤에 나올 씬일텐데, 정작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게으름을 갖고 있어서 뻔한 기승전병의 21세기적 구성으로 진행중이다. 

아, 요새는 시덥잖은 개그에도 회가 동하지 않는다. 두뇌회전이 적은지 재미가 없다.

얼마전에는 친구가 늦은 나이에 해외유학을 꿈꾸며 고민을 하길래 집안은 집안 너는 너라며 애드벌룬처럼 부푼 희망찬 멘트를 불어넣어주었다. 정작 나는 유학이 아니라 유학준비를 포기했었고, 실패로 남는 교훈은 이력서나 자소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새 그 친구는 자기에겐 그렇게 좋게 말해놓고 너는 왜 이러냐며 나를 타박한다. 잠깐 돌아봐도 망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거나 환경이 받쳐주는 느낌이다. 사실 뭘 시작해도 망할 생각부터 하긴 한다. 

그러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될 때에 분하고, 억울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된다. 그런 것들 떄문에 바득바득 살아가고 있다고까지 말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된다. 군대 가기 전에는 철 들지 않은 채로 돌아오겠노라 다짐했지만, 이제 와서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스물 두살짜리 사내새끼들 보고 있자면 한숨부터 난다. 누굴 탓하고 변명할 계제가 못 된다. 망하는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죽기 직전의 그 묘한 기분이 무서워 스스로 죽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 이유는 없지 않나. 아 진짜 왜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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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19 17: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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