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야기'에 해당되는 글 187건

  1. 2011/12/30 꾸준히 싫어하는 것도 능력이다. (6)
  2. 2011/09/29 내 마음이 아니라 몸이 황무지 (2)
  3. 2011/09/20 복권 (4)
  4. 2011/09/14 억울의 실종 (2)
  5. 2011/05/13 월수 백오십의 시야 (8)
뉴스를 보든 뭘 보든 우리나라 사람들은 으레 부정적인 사건, 혹은 그로 인해 생긴, 감정에 강한 반응을 보이는 거 같은데 그게 딱히 나라고 다른 것은 아니라서 언제 어디서 요상한 뉴스를 듣더라도 화내고 슬퍼할 준비를 하고 있다. 반면에 자신이, 내가 관련된 사건에서는 감정들이 선명히 보이지 않는다. 잘 못 노는 사람들의 특징이 멍석 깔아주면 쭈뼛거리는 거라던데 딱 그 꼴이다. 원인을 여러 군데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역시

내가 착해서 그런거 같다.

사람이 이렇게 착하지 않다면,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화내야 할 때 정당하게 화내는 걸 포기할 리가 없다. 이게 다 사람이 선천적으로 착해서 생기는 일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공교롭게도, 싫어할 상황을 부르는 것 또한 이 성격이다. 지겹게 말해온 것이지만 나는 이른바 '나는 당신과 친해질 준비가 됐어요.' 스타일이(었)다. 붙임성 있으니까 말이 너무 많을지언정 사람 만나기 힘든 편은 아닌데, 이게, 이게 안좋은 게 많다. 상대방이 나를 너무 가벼이 보더라. 남이니까 살갑게 대하는 거지 나는 내 스스로의 도덕적 목표치가 있고, 그 스탯 찍을려고 여즉 안 죽고 있다. 물론 이거는 내가 정한 거니까 내가 아닌 남은 어떻게 살든 딱히 관심이 없어야 정상이다. 내가 사는대로 너도 이렇게 살라고 하는, 병신이 어딨나. 그런 사람 있으면 어디 관등성명 좀 대봐요. 

뭐 여하튼, 그렇게 나와 너의 기준이 다를진대, 내 기준을 오해하는 친구들이 간혹 있다. 이런 친구들이 스테레오타입은 다음과 같다. 부모님의 은덕을 자신의 여유인줄 알거나 군대 안다녀왔거나, 둘 다거나. 학기 중에 만나는 친구들마다 늘 '봐봐, 내 안의 꼰대가 이렇게 커졌어!'라고 개드립을 쳤는데, 사실 이건 좀 걱정이다. 

그래서 정말이지 전역하고 처음으로 현역 간지로 '미쳤냐?'를 내뱉기도 하고, 다 귀찮다며 척을 지고 아예 안보기도 한다. 정말 나는 이런 거 없을 줄 알았는데 하나도 안 빠뜨리고 터지길래 스물세 살 싸이월더처럼 슬펐다. 하루키처럼 런닝한 체력으로 카프카처럼 섹스하기도 아까운 이 시간에 이따위 것에 정력을 써야 하다니! 내가 아무리 남는 게 시간뿐이지만 그래도 아까운 건 아깝다. 

그래서 까먹었다, 싫은 것들을.

속 편하다. 내가 저지른 창피한 일을 만회하는 건 빠르게 잊어먹는 건데, 이게 내 잘못뿐만 아니라 안좋은 일 전부에 즉효더라. 멀쩡하게 잘 살게 된다. 여기에 '남자가 뭐 그렇게 사소한 거 가지고...' 한 번 써주면 주민등록 말소되듯 깨끗하게 사라진다. 다시 언급하면 남자도 아니고, 째째한 거고, A형인 거고, 소심한 거고, 블라블라. 사내색기 혼자서도 까페에 갈 수 있는 내 안의 여성성 덕분에 이런 이야기 나오면 내가 좀 힘들다. 그래서 걍 소녀감성으로 사는 게 나은 거 같기도 하고...
다 좋은데 감정보다는 사실이 안 없어지더라. SNS에 뺴곡하니 적어놓은 것도 아니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건 별 상관없는데 내가 암.  이-상하게 쪽팔린 거랑 빡친 거랑은 안 잊혀짐. 

그니까 계속 싫어해야 맞아 떨어지는 건데, 사람이 워낙 착하다 보니까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누군가에게 욕을 하거나 싫은 내색을 하는 건 눈 앞의 상대방이나 남에게 그 감정을 던지는 것이기에 내게 남지는 않는다. 평소 대화중에도 쌍시옷 단어나 속어 많이 쓰는 편인데, 이건 또 대화 속에 흘러가는 편이라 쓰는 나나 듣는 친구들이나 별 감흥 없다. 들리지만 걔들에게 한 것은 않으니까. 덜 친하거나 좀 서먹한 사이면 여기서 호오가 갈리곤 한다. 나 또한 덜 친한 사람이 씨발과 존나를 연신 뱉어내면 마음 속 미간부터 찌뿌려진다. 

싫음을 유지하는 것은 이와는 좀 다르다. 악감정을 내가 계속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늘 그 개체를 싫어하고 있어야 하며 그 생각만 나면 늘 얼굴을 일그러뜨릴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게 생각보다 고된 정신 노동이다. 외사랑은 설혹 어장에 들어가 있어도 좀 애틋하고 다소 희뿌얘도 따뜻한 게 있는데, 여긴 뭐 답이 없다. 지쳐서 못하겠다. 근데도 해야 하는 게 함정. 기억에선 잠깐 잊혀져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새끼는 계속 개새끼고 샥련도 계속 샥련. 아아, 섬머 이 샥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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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훵ㅋㅋ 2011/12/31 00:18 Address Modify/Delete Reply

    깨알같은 섬머 디스... 아 또 빡치네요;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2/01/02 01:54 Address Modify/Delete

      아, 인스타그램에 주이드샤넬 언니가 있는데도 팔로우 안하고 있어요. 괜히 싫어요!

  2. 베르커드 2012/01/01 02:05 Address Modify/Delete Reply

    21세기 수유리의 아큐정전이 요기잉네.

  3. jenny 2012/01/10 14:4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섬머가 꼭 년이라는법은 없음-놈도 있던데?
    그래서 기억에서 잠시 잊혀져도 생각은 계속 나대?
    암튼 나잇값못하는게 문제야. 우린 이제 더이상 어리지않은데 어리다고 생각하나봐.
    나 지금 뭐라 그러냐?

근무시간이 좀 많은 거 같았지만 그래도 알바는 어쩔 수 없다 싶어서 백만원 조금 넘는 월급에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만난 형이 매장 앞에 와서 반가워 나갔는데 들은 말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다였다. 아니, 이 형이 아니었나? 여하튼 살이 쪘다는 말보다는 빠졌다는 말을 더 많이 들은 것 같은데, 친구들은 알겠지만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안되는 체격이다; 
일도 하고 있었다는 건 맘만 먹으면 엥겔지수를 90%까지 올릴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나의 거의 모든 알바 경력은 음식점에서 나오므로(이런 곳은 대부분 식사-_-제공이다.) 기초적인 생활정도는 힘들지 않게 영위할 수 있는데도, 살빠졌다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근 1년간 잘 먹고 잘 지내다가 생활이 바뀐지 보름 남짓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날 보고 말하던 '살빠졌다'는 말을 이제는 내가 스스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론 앙상해진 거였다. 이거 좀 신기했는데, 나는 원래 눈썰미랄까, 타인의 대한 관심이랄까 그런 것이 되게 부족한지 티비에 연예인이 나와서 누군가 '쟤 살 많이 뺐네.'해도 전혀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는데, 그런 능력을(?) 습득한지도 몇년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변화도 알아챌 수 있게 되었다. 어른됐네, 어른.

당연히 소설이겠지만, 인터넷에서 텐프로 출신 여성의 일기같은 걸 얼마전에 읽어봤는데, '다른 언니들은 돈 달라고 들이대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않아서 오빠들이 좋아했다.' 뭐 그런 비슷한 구절이 있었다. 돈이 급하지 않아서 일하는 것이 아닌 게 장점이 되는 셈이다. (아, 저 위에 말한 매장에서 그만둘 때, 대판 싸우고 나왔는데 그때 점장이 마지막으로 나보고 '너는 돈이 필요해서 일을 하는 것 같지 않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는 그냥 그 공간, 가로수길에서 나오고 싶은 마음뿐이라 가만히 있었는데, 나중에 이 이야길 들은, 같이 일하던 친구는 꽤 화를 냈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었던 게 아니 돈이 급하지 않으면 내가 대학 휴학하고 왜 하루에 10시간씩 일했겠냐고... 라고 한쪽으로 몰아갈 수 있겠다.)
뭐 어쨌든 금전적으로든 감정적으로든 구석에 몰리지 않은 사람의 긍정적 태도는 상당한 것 같다. 07년쯤에는 별거 아닌 애들이 자신감은 쓸데없이 많아서 보기 싫은 구석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 생각 자체가 창피해서 자진납세하듯 먼저 말하고 싶을 정도다 ㅋㅋㅋ 

월초에는 생돈을 잃어버려서 사서 고생했었는데, 최근에는 뭐 산 게 없는 거 같은데 잔고가 바닥나버렸다. 눈에 띄는 소비래봤자 좀 비싼 vga케이블과 좀 싼 토너를 산 게 전부인데 난 뭐한 걸까. 무려 8월 교통비도 납부하지 않았는데! 라고 투덜거린 게 일요일쯤이었는데, 어찌어찌해서 연명해가고 있다. 기숙사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는 날엔 편의점에서 할인카드와 함께 라면과 삼각김밥을 사고 재빨리 먹은 후에 강의실 직행...한 게 이틀이었는데, 딱 그 이틀이 지나니까 살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착시효과일까 부정적인 위약 효과일까. 

반 찌질이 반 병신같은 마인드로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된 다음 날, 솔직히 너무 성급하게 결정한 것인가 싶어서 마음이 흔들렸는데 그 날 아침에 삼양동 집의 인터넷 요금과 내 핸드폰 요금이 결제됐다는 문자가 날라왔다. 잔고가 만얼마 수준으로 떨어지니까 기분도 다운됐는데,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을지언정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조금 편해졌는데 문제는 이제 몸이 황무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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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KT 2011/09/29 23:07 Address Modify/Delete Reply

    너 결국 헤어졌냐? 킁;;;; 아쉽구만...

복권

내 이야기 2011/09/20 00:17 |
재수할 즈음에 400억짜리 로또광풍이 불었다. 가뜩이나 작은 창문에 쇠창살까지 달았던 곳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으니 바깥은 어렸했으랴. 재수는 하고 있지만 미성년자라서 사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는 대내적인 이유로 일확천금에 대한 관심을 일축했으나 사실 나는 그런 운이 없다. 공짜에 관해서는 '될 턱이 있나'하는 선천적 회의주의자도 아닌데도 역시나 나와 운의 거리는 멀다. 어린 마음에 '뽑히면 좋겠다는 마음만 안 가지고 있으면 뽑힐거야'라는 순진멍청한 태도도 견지해보았지만 역시나 닭 쫓던 개꼴.

어느 정도의 기준점이 지나고 나서는, 토요일 저녁에 서둘러 로또를 사고, 티비를 보면서 번호를 맞춰보는 모습이 너무나도 평범해보여서 싫어했다. 혐오했던가. 내가 뭐라도 된듯, 아니 나는 뭐라도 되지 아니한 듯 싫은 티를 내며 고결한 척 고까운 티를 냈다. 

얼마 전에는 a와 같이 로또와, 연금복권을 샀다. 하나는 익숙한데 하나는 매달 오백을 주는지 매년 오백을 주는지 헷갈려서 a와 나는 안내문을 해독하는데 꽤 공을 들여야했다. 그리고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뽑힌 사람이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해주자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면서 동네를 걸어다녔다. 우리는 이미 미국과 프랑스에 다녀왔고, 집을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참이었다.

그날 저녁 이같은 이야기를 들은 b는 언젠가의 나와 같은, 그 찡그린 표정을 보여줬다. 네 마음은 알고 나도 좋은 행동은 아닌 것을 알지만 어찌됐든 상관없지 않느냐. 되면 좋은 일이고 안되면 다음을 기약하고. b는 표정을 풀지 않았고, 이제는 a가 갸우뚱거렸다. 

복권따위에 매달리는 삶, 복권 가지고도 행복해할 수 있는 삶. 무엇이 옳고 무엇이 틀린 것인가. 사실 이제 와선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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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훵키훵키 2011/09/22 14: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도 그렇게 한 번 꿈꾸고 그걸로 한바탕 웃기도 하고 그런답니다.. 웃을 일이 조금씩 줄어드네요. 같이 힘내용!!

  2. 슈3花 2011/09/23 13:5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무리 좋은 꿈을 꾸고.. 조상님이 점지해준 번호대로 번호를 찍은 후에 복권을 산다고 해도.. 현실은 한낱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더군요ㅠ 그래도 우리 힘내요!!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9/29 15:26 Address Modify/Delete

      아 하나 더 사야하는데 말이죠...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꼭ㅋ

억울의 실종

내 이야기 2011/09/14 20:40 |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연휴 다음날 발표를 잡았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여하튼 끝내고 나니 노곤해진다. 몸이 힘들다기보다는 무언가 늘 쫓기고 있다는 마음의 피로였지 않았나 둘러댄다. 누군가는 그런 데서 오는 스릴을 찾는다던데 내게 실제로 오는 것은 스릴보다는 중압감에 가까운가. 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못하고, 힘들어하고, 피하는 것은 어떤 정신병일까. 부족함을 질환으로 돌리는 것은 우리집 어른들이 자주 하시던 말인데, 시나브로 나도 물들어버렸다. 어른이 되버렸나. 어느새 다 컸다. 그래서 어른스럽게 투덜거린다. 무능은 죄악이니까.

구십몇년인가 만난지 채 일년이 되지 않았던, 어떤 계모는 내게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고, 내가 무언가(아마도 장난감이었을까, 사실 그게 무엇인지는 이제와서 중요하진 않다.)를 사달라며 응석부리는 것을 막으며 이야기해주었다. 괜한 사람에게 응석을 부렸다는, 또 다른 실수가 생각나지만 뭐 그런 것 말고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들은 말은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뇌리에 박혀 있다. 어찌보면 되게 불행한 건데 그것마저 당연한 척해야 하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 배웠나? 모르겠다. 듣긴 들었다만 그당시도 지금도 그리 중요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환경이 사람을 만들다보니 중요하지 않은 말이 오랜 기간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에 일주일 용돈은 이천원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천원이었다.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는 한달에 얼마씩 받아서 쓰는 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였기에, 계모와의 용돈 협상 자리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그때도 군것질을 좋아했던 터라 하교길에 삼백원하는 유리병 환타를 사먹을 수 있겠다 싶었고, 그걸로도 족하다 싶어서 시세 모르는 용돈 지급에 응했다. 사실 그전에도 할머니께 슈퍼를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천원을 받긴 했다. 뭔가 좀 뒤틀려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때가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보통의 핵가족 형태를 처음 가진 때였기 때문이었나. 새로 산 침대와 일학년부터 쓰던 동서가구 책상이 같이 있는 내 방이 있는 때이기도 했다. 남들처럼 살고는 있지만 뭐 딱히 행복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가깝게 지내야겠다 싶어, 이모라고 부르던 계모를 엄마라 부르며 볼에 뽀뽀를 하는 그야말로 어린이 프로에나 나올 법한 흉내도 해보았지만, 처음 부르는 호칭은 어색했고 입술에 푸석함이 닿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뭐가 행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늘 뭔가 없었고 부족했으며 아쉬웠다. 

 
스무한 살인가 누가 무얼 가지고 사냐며, 삶을 사는 원동력이 뭐냐며 물어봤었다. 스스럼없이 분노.라고 답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들어도 배를 부여잡고, 침을 튀기며 크게 웃으면서 그때 나 정말 병신이었네. 하고 까도 내가 먼저 까고 말겠지만, 실은 뭐 좀 그랬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고. 무울론 당신께서야 손주 위해서 하신 말씀이었지마는 뭐 계속 그런 분위기였다. 아버진 고졸이지만, 할아버지가 안계신 상황에서 작은 아버지를 육사에 보냈다. 세 분의 미묘한 감정선을 그나마 추측할 수 있게 된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작은 아버지가 전역한 후였다. 

뭐 좀 그랬다.

 그러면 어려서부터 뭔가 엄청난 자극을 받고 공부에 매진해서 좋은 대학 좋은 회사에 들어가 미스터 최가 되는 것이 5부작 인간극장 中 4편쯤에 나올 씬일텐데, 정작 나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게으름을 갖고 있어서 뻔한 기승전병의 21세기적 구성으로 진행중이다. 

아, 요새는 시덥잖은 개그에도 회가 동하지 않는다. 두뇌회전이 적은지 재미가 없다.

얼마전에는 친구가 늦은 나이에 해외유학을 꿈꾸며 고민을 하길래 집안은 집안 너는 너라며 애드벌룬처럼 부푼 희망찬 멘트를 불어넣어주었다. 정작 나는 유학이 아니라 유학준비를 포기했었고, 실패로 남는 교훈은 이력서나 자소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요새 그 친구는 자기에겐 그렇게 좋게 말해놓고 너는 왜 이러냐며 나를 타박한다. 잠깐 돌아봐도 망하는데 천부적인 소질을 갖고 있거나 환경이 받쳐주는 느낌이다. 사실 뭘 시작해도 망할 생각부터 하긴 한다. 

그러다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생각될 때에 분하고, 억울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된다. 그런 것들 떄문에 바득바득 살아가고 있다고까지 말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된다. 군대 가기 전에는 철 들지 않은 채로 돌아오겠노라 다짐했지만, 이제 와서 여드름이 덕지덕지 난 스물 두살짜리 사내새끼들 보고 있자면 한숨부터 난다. 누굴 탓하고 변명할 계제가 못 된다. 망하는 이유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죽기 직전의 그 묘한 기분이 무서워 스스로 죽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살 이유는 없지 않나. 아 진짜 왜 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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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19 17: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그리도 원하지 않았던 4학년이 되고나니 나는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이제까지 이 짓를 해왔나 하는 소회가 생긴다. 결국, 얼마간의 월급과 사회초년생으로서의 지위가 이제껏 놀아 제껴온 시간의 데칼코마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얼마를 받고, 그 얼마로 어떤 걸 사고, 어떻게 쓰고 하는 것보다는 얼마가 있어야지 사람답게 살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밥 굶고, 옷 기워입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만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을까.가 느닷없이 대내적인 화두로 기어 올라왔다. 시험기간 때 책상 정리한다더니 막상 돈 벌고, 빚 갚아야 할 때 되니 유난스럽게 이지랄을 떨고 있다. 

최근 1~2년간의 아르바이트는 의외로 짭짤해서 그간 88만 원도 못 벌었기 때문에 나는 88만원세대에 포함되지 못한다며 혼자 중얼거리던 게 무안해졌다. 성인 피시방이나 사설 경마장 같은 데에 가서 한 달에 이삼백 번 것도 아니고 고작 이삼십만 원이 늘어난 것뿐인데도 불구하고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느긋해졌다. 여기서 혼자 월세방 잡고 산다치면 월 백오십으로 적어도 굶진 않는 생활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죽진 않는다.와 살 수 있다.의 중간 지점,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는 정도. 
추정치 월수 백오십은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생활의 심정적인 마지노선이다. 매번 퇴근과 동시에 일당을 받는 생활은 수도꼭지 끝에 매달려있는 물방울 하나에 의지하고 사는 것 같아서 목마름은 해갈한다 치더라도 시원하게 마실 수 없어 답답해 미칠텐데, 월급으로 받게 되면 그나마 낫다.
다만 그나마.에서 변하지 않는다. 보험료 뗀 돈으로 월세 내고, 밥 먹고, 교통카드 충전하면 지갑이 마르기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 맘 달랜다고 맥주 한두 캔 따다 보면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가고 다시 원위치.

나이도 많아서 인터넷도 안하고 보는 것도 고만고만하면 그냥 촌부처럼 살 수 있을텐데, 역시 모든 문제의 원흉은 인터넷이다. 모르고 사는 게 정말 편할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다고 내가 너무 알아버린 사람도 아닌데 말이지. 정보에 대한 접근이 자연스러워지면서 행복의 기준은 한없이 올라가버렸다. 포항에서 만났던 그 택시 기사는 과연 마이바흐와 마세라티를 알고 있을까. 그 아저씨와 나 둘다 그 차를 못 타보긴 마찬가지일텐데. 이름이나마 그걸 알고 있는 나는 과연 행복한 것인가. 

휴학하고 나서야 대학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가 보였다. 자신은 이미 대학생이란 신분이 어느 정도의 지식 수준과 교양, 사회적인 위치를 함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래 중에 대학생이 아닌 사람을 찾아봐라. 그리곤 네 무력함을 증명해봐라. 기껏 기천만원을 써서 대학을 가고, 또 다시 기천만원을 써서 대학을 졸업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미 사회는 대학졸업생이 만연하고, 이런 대졸자 인플레는 대학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근데 가성비는 나쁘다. 하지만 이미 투자한 금액이 있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계속 부어야 한다. 천상 밑빠진 독인데 물도 내 물이 아니고, 어디서 사온 물이네. 수학이라고는 중학교 2학년 1학기부터 내려놓기 시작했는데 이자율 계산을 해야 한다. (사실, 아직도 엄두가 안나서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는 이야기인 것은 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공부를 해야할 필요에 대해서 회의를 가진다. 그 수많은 지식을 수천만원을 들여가며 배운 것의 결과가 이따위로 나오니, 그간 배운 지식으로 판단해보았을 때 이는 심각하게 비효율적이다. '교육'에 가격대 성능비를 대는 것에 미간을 찡그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이니까.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의 서문에서 자신의 (10살도 안되는) 아들의 예를 들면서 이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교육을 시키는 것보다 일정 연령이 지났을 때 노동시장으로 보내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 했다. 나는 반박할 수 없다.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은 맛집 블로그를 운영하지만, 살기 위해 먹는 사람들은 편의점에서 1+1 행사 제품을 찾아보고, 햄버거 가격이 비싸진 것보다 배부르지 않은 것에 실망한다. 생활의 기준이 진리 탐구나 쾌락이 아니라, 하루를 굶지 않고 넘기는 것에 무게를 두게 될 때, 그 생활의 시야는 무척이나 뿌옇다. 

'5천원의 딜레마'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한달 생활비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대충 때려잡아 88만원이라고 하자.) 밖에서 먹는 한끼 식대에 투자할 수 있는 최대치는 5천원이다. 그보다 천원이라도 비싸면 가계부에 무리가 온다고 느낀다. 실제로도 상당히 위험하다. 고작 천원이 더 들 뿐이지만, 곧 죽을 듯이 사양하게 된다. 한시간을 일해서 한끼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심정적, 가계부적 마지노선이니까. 금전적인 여유가 삶의 질을 억누른다. 나는 한달에 백만원 좀 넘게 받는 알바를 시작하니까 이 딜레마를 깨볼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물론 기회비용이 아예 없어진 것은 또 아니고...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친구들에게 잉여 생활비는 자신의 시간과 삶의 질보다 높은 가치를 가진다. 사람이 게으르고 부지런한 정도의 차이에 따라 상이하지만, 영순위는 분명하다. 아무리 국민학교때부터 씽크빅하면 창의력이 생긴다고 듣고, 그 창의력은 지금에 와서 월급의 차이를 줄 정도라 왠지 그때의 카피가 되게 그럴싸하게 생각되는데 월수 백오십의 시야는 그리 넓지 못하다. 딜레마는 깰 수 있을지언정 씽크빅해지진 않는다. 좀 더 여유로워지면 그렇게 되려나?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남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이런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비생산적이고, 고로 비경제적이다. 이럴 시간에 내일의 노동을 위해 푹 자두는 것이 현명하다. 시야가 넓고 좁은 것이 당장 먹고 사는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반박하진 않겠다. "어떻게 사냐?"는 물음에 힘든척 잔뜩 하면서 투덜댈 순 있지만, "왜 사냐?"는 물음엔 말수가 급격히 없어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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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hands 2011/08/11 15:2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아... 어려운 이야기야... 그나저나 나 2백씩 벌어도 편의점에서 저녁먹고 5천원에 벌벌떨고 그랬는데..;;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8/13 01:21 Address Modify/Delete

      하하 밥값 정하기 힘들어요.
      사실 도시락 싸서 다니는 것이 가장 현명하지만 ㅠㅠ

  2. Favicon of http://nsw.com BlogIcon 나상 2011/08/11 16: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전이 본 글처럼 읽히길래 신기하네 했건만 전에 본글이구나.
    리플로 할말을 본문에 다 써놓아서 쓸말이 없구만ㅎㅎ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8/13 01:22 Address Modify/Delete

      얼레 너도 읽었었냐;

      예전에 잠깐 공개해뒀는데 아무래도 지저분해서 다시 비공개로 돌렸었어; 근데 토씨 하나 안바꾸고 다시 발행했네 허허

  3. Favicon of http://at4w.tistory.com/ BlogIcon at4w 2011/09/17 22:14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오오 대학생이셨군요...몰랐어요. 글을 가끔, 그리고 힐끔거리며 보기는 하는데 문장의 깊이는 항상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 Favicon of http://solidground.kr BlogIcon CIDD 2011/09/29 15:25 Address Modify/Delete

      아, 부끄럽습니다;

      문장은 깊이가 있다기보다는 가난하게 살면 이렇게 나옵니다; 사실 막 갈긴 거라.... 여하튼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4. Favicon of http://at4w.tistory.com/ BlogIcon at4w 2011/10/01 09:09 Address Modify/Delete Reply

    에에? 좋은말씀이라뇨.. 당연한 말을 했을 뿐인 겁니다. (웃음)